여자는 들어오자마자 카운터에 몸을 부빈다.
아직 이렇다 할 대화나 몸짓은 없었지만 나는 선수를 빼앗긴 느낌이 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도 호흡은 한숨이 된다. 무슨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어짜피 시키는 대로 해야할 것을, 하며 그냥 생각을 멈춘다.
여자의 옷차림으로 보건데 새벽에 추울 법 하다. 망사와 얇은 옷 중간쯤 되는 속이 비치는 흰 가디건에(이게 뭐라고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배꼽이 보이는 흰 탱크탑, 흰색 초 미니 청바지를 입었다. 유추하건데 어딘가 덥고 시끄러운 곳에서 몸을 흔들다. 집에오는 길에 몸이 식어서 추운가 보다. 유난히 '따뜻한' 단어에 힘이 실려있다.
내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데 초점이 잘 안맞는다. 나는 굳이 눈을 맞추지 않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죽은 따뜻하지 않은데, 잔자렌지 돌려야 따듯한데.. 하는 약간은 불길한 생각을 하며 "저어~기요" 한다.
여자는 여전히 상반신을 카운터에 희안하게 걸친 채로 고개를 다시 고꾸라트리며 "어어~디요?" 한다.
곧 무너져 내릴듯한 몸뚱아리를 보며 갈등에 휩싸인다. 이걸 데리고 죽 앞으로 가야하나 아니면 여기서 계속 여자가 움직이기를 기다려 볼까. 그러나 고꾸라진 고개는 다시 쳐들어질 생각을 않는다.
분명히 여자에게 악의는 없다. 나는 그것을 왜 아느냐면 술에 취한 사람들은 예상과는 다르게 거의가 착해지는 것이다. 내 기준 싸가지가 없는 사람들은 내 말에 대답하기 싫어 무시하거나 술도 안마셨는데 술마신 서람처럼 개념이 없는 인간들인데, 술을 마신 사람들은 무언가 실수하거나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듣고, 대답한다. 다만 몸이 맘대로 안 움직일 뿐.
술취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게 처음은 아니지만 같이 쇼핑을 하는건 또 처음이라 망설여진다. 게다가 옷도 많이 안 입은 젊은여자 아닌가?
잠시간 고민이 되었지만, 어짜피 내가 가만히 있으면 여자는 눈을 영 감아버릴 모양새다. 손을 붙잡고 죽들이 있는 매대 앞으로 조심조심 모시기로 한다.
묘하게 의문사가 된 말을 붙혀본다. 아니아니 대답이 돌아왔지만 상황은 별 다를게 없다. 손을잡고 끄니 졸졸 잘 따라온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전복죽을 들었다 놨다 한다. 시선은 2+1 이 적힌 가격표랑 죽 사이를 왓다갔다 한다. 아우 젠장 뭘 또 고민하고 있는거지.
가격표에 적힌 글은 상당히 작아서 그냥 봐도 잘 안보이는데 게슴츠레 한 눈으로는 코를 박고 들여다 봐야 보일테지, 속으로 딴생각 들을 하며 여자의 결제를 얌전히 기다린다.
여자가 심사숙고한 후, 전복죽 2개 야채죽 하나를 들고 '따뜻한' 죽을 만들러 간다. 이미 나는 여자의 종놈이라 데워주세요오 하는 말이 돌쇠야 가자~ 처럼 들린다.
죽은 1개를 전자렌지에 돌리려면 1분 30초 돌려야 하는데, 3개니깐 한 2분 30초 돌리지 뭐. 여자가 "두개만 돌리고 하나는 집에가서 데울래요" 한다. 문득 뭔가 억울한 생각이 솟았으나 생각을 멈춘다. 빨리 해치우자 빨리..
전자렌지가 돌아가는 중에 나와 여자는 말 없이 2분 30초를 견딘다. 전자렌지의 시간은 참으로 느려서 2분 30초 동안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재밌었던 일을 돌아가며 이야기 할 수도 있을것 같다. 갑자기 여자가 미안한듯 말한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아니요" 한다. 그러나 한 번도 빼먹지 않았던 안녕히 가세요 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애니)
비키니입고 바닷가를 간 자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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